"사이"의 미학
포근히 잠이 엉기고 아롱아롱 꿈이 짙어 지극한 낙(樂)이 그 사이에
스미는 듯, 마음이 섬세하고 맑아지어 묘경(妙境)이 비할 바 없는 것이
취리(醉裏)의 건곤(乾坤)이요
몽중(夢中)의 산하이며, 가을매미 소리는 실을 뽑는 듯하고 하늘에선
꽃들이 숱하게 떨어진다.
고요한 마음은 도가의 내관(內觀:묵상) 같고, 깰 때는 선가(禪家)의 돈오와
같아, 삽시에 숱한 번뇌를 훌쩍 지나가거니, 아 이런 때엔, 비록 추녀가
몇 자나 되는 고대광실에 잘 차려진 큰 상을 받고 시첩(侍妾)이 수백 명이
있다 해도,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구들목에, 높지도 낮지도 않은 베개
를 베고,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이불을 덮고, 깊지도 얕지도
않은 술잔을 받으면서, 장주(莊周)도 호접(胡蝶)도 아닌 사이에 노닒”과
바꾸지 않으리라.
或旖旎婀娜至樂存焉 或廉纖巧慧 妙境無比 所謂醉裡乾坤 夢中山河 秋蟬曳緖空花亂落
其冥心如丹家內觀 其警醒如禪牀頓悟 八十一難 頃刻而過 四百四病 倐忽以經 當是時也
雖榱題數尺 食前方丈 侍妾數百 不與易 不冷不溫之堗 不高不低之枕 不厚不薄之衾
不深不淺之杯 不周不蝶之間矣
여행 중에 여러 날 잠을 못자, 너무나 자고 싶은 바람과 꿈결 속에서 쏟아
져 나온 말들이다.
연암의 재치가 빚은 「몽설(夢說)」이라 할 글,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연암
특유의 ‘사이’의 수사학이 새겨져 있다.
이 같은 연암의 화려한 ‘사이의 미학’은 <장자>에서 배태된 것이다.
‘사이’에 대한 인식과 사유 그리고 수사학은 사실 <장자> 전체를 관류하는
기저음이다.
이 ‘사이’란 중(中)이요, 하나(一)이며, 통(通)이요, 균(均)이요, 평(平)의
정신이며 이것은 또한 제물론(齊物論)의 다른 이름이거나 또는 그것이
펼쳐지는 세계의 장일 터이다.
제물론의 마음은 언제나, ‘편재(遍在)’라는 우주의 신성한 태반에서
생성된다.
사이로써 ‘치우치지 않음’이란 어느 하나에만 머물려하지 않는 것이며,
무엇보다 생과 우주의 양면적 진실을 이해하는 것이요,
그 이해 속에서 양자를 안는 조화의 자리를 얻으려하는 욕구이다.
하여 이중 부정의 ‘사이’엔 언제나 ‘이중 긍정’이 좌정하고 있다.
연암의 사이의 미학이 보여주는 다양한 변주들 또한 이러한 사유의 젖줄
에 닿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단 이런 ‘사이’의 철학은 일상의 쉬운 일화로도 얼마든지 치환된
다. 인도의 어느 구두 닦기가 말하는 순박한 사이의 미학을 들어보자.
“구두를 애지중지 모셔놓기만 하면 곰팡이가 피거나 좀이 슬지.
구두를 함부로 신고 다니면 어느새 닳아 낡아버리게 되지.
구두끈을 꽉 묶으면 풀기도 힘들고 걸어다녀도 편하지 않지.
구두끈을 느슨하게 묶으면 어느새 풀려 질질 끌리는 것도 모르고 신고
다니다가 신발이 벗겨져버리지.
구두약을 많이 바르면 광이 무뎌지고, 구두약을 조금 바르면 광이 나지
않지. 힘들다고 약하게만 닦으면 때가 빠지질 않고, 정신없이 너무 세게만
닦다 보면 껍질이 벗겨져 구두가
상처를 입지. 깨끗한 수건으로 닦다 보면 수건이 더러워지고, 더러운 수건
으로 닦다 보면 구두가 더러워지지.
내가 살아가는 방식도 이러한 중도에 따른다네.
(원성, <시선>중에서)” 우리가 모두가 신고 다니는 ‘삶'과 '마음’이라는
구두, 이것을 다루는 방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 삶이란
사이에서 꾸는 꿈이런가?